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당항포 해전 (문단 편집) === 상세 === 6월 2일에 당포 해전을 승리로 이끈 이순신과 원균의 연합 함대는 당포 앞바다에 정박해 전략 회의를 계속하면서 수색 활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했다. 3일에는 수색을 했으나 적들이 보이지 않았고, 4일째 되던 날에 거제도 주민들로부터 당항포에 일본군의 전선이 정박해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였다. 그리고 그날 저녁에 [[이억기]]의 전라 우수영 전선 25척이 뒤늦게 합류했으며[* 이억기의 함대가 합류하자 진중의 모든 사람들이 기뻐했다는 기록이 난중일기에 남겨져있다.], 연합함대의 규모는 51척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조선 연합 함대는 6월 5일 아침 안개가 걷히자마자 당항포로 진격하였는데 포구에는 왜군 대선 9척, 중선 4척, 소선 13척이 모여 있었다. 연합 함대는 당항만 어귀에 전선 4척을 숨겨두고, 거북선을 앞세워 일제히 공격을 가하였다. 조선 수군의 갑작스런 공격을 받은 일본군도 조총을 쏘아 대며 대응 태세를 취하였다. 이에 아군은 일본군의 육지 탈출 봉쇄와 주민 보호를 위해 일본군을 바다 한가운데로 유인한 뒤, 적선을 포위하고 맹공을 가하였다. 적선 대부분은 여기서 격침되었고, 도주하는 나머지 일본군의 전선들도 모두 추적해 불살랐다. 4척의 대선은 육지로 도망쳤으며, 도망친 패잔병들을 소탕하기 위해 남겨둔 전선 1척은[* 여기서 이순신 장군의 백성 사랑하는 마음을 볼 수 있는데 적의 배를 모두 불태운다면 적들은 육지로 도망을 가게 되고, 그렇게되면 육지에 있는 조선 백성들이 피해를 받기 때문에 왜적이 타고 도망갈 전선을 남겨두었다고 당포파왜병장에 기록해두었다.], 패잔병들이 몰래 배에 올라타 도주하려 배에 올라타자 미리 이순신의 명을 받은 방답 첨사 [[무의공 이순신]](李純信)에 의해 6월 6일 새벽에 섬멸되었다. 이때 [[원균]]이 적선에 올라타 수급 50여급을 베어내기도 했으며[* 당시 수급은 전공의 척도로 매우 중요했다. 원균과 이순신의 차이점은 원균은 억지로라도 수급을 가져가려 했고 이순신은 그렇지 않았다는 점이다.] [[무의공 이순신|방답첨사 이순신]]도 활을 직접 쏴 적장을 맞춰 죽이는 전과를 세웠다.[* 이 적장은 매우 젊었는데 맹렬히 싸우다 10여발의 화살을 맞고서야 사망했다고 한다.] 1592년 6월 7일 사천, 당포, 당항포에서 해상 전투를 벌인 조선 수군은 연합 함대를 구성하여 웅천 증도 앞바다에 진을 치고 있었다. 전라 좌수사 이순신이 23척, 전라 우수사 이억기가 25척, 경상 우수사 원균이 3척 등 모두 51척의 전선으로 구성된 함대였다. 이때 거제도 앞바다에서 일본군의 전선 7척이 율포에서 나와 부산진 쪽으로 향하는 것을 발견하였다. 정오 쯤에 영등포 앞에 이르자 조선 수군은 세차게 배를 몰아 율포만으로 추격해 들어갔으며 전선 2척을 나포하였고, 나머지 전선 5척을 불사르고, 일본군을 36명의 목을 베었다. 이것이 2차 출전의 마지막 전투인 [[율포 해전]]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